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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버스
방석순 2007년 06월 29일 (금) 06:22:13

장마 구름이 잠시 나들이를 갔는지,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시던 며칠 전 오후였습니다. 버스 칸에 올라서도 너무나 맑고 고운 하늘에 감탄하며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렸습니다.

“지금 하늘 한 번 쳐다보세요. 몸이 둥실 떠오를 것 같지 않나요.” “하늘 사진 긴급 공모! 푸짐한 상품 있음.”

한참 싱거운 짓을 하고 있는데 차창을 내다보던 귀여운 아가씨가 내려야할 곳에 이르렀는지 출구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아가씨가 입고 있는 검정색 티셔츠가 차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화창한 햇볕과 극한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얄팍한 티셔츠의 등쪽, 목덜미 부분은 더위를 덜게끔 시원하게 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깊게 패인 부분에 작은 구슬 같은 점 하나가 까맣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저게 무얼까. 만약 살갗에 타고난 점이라면 응당 모른 체 넘겨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새하얀 살갗에 무슨 검불이라도 붙은 것이라면. 아가씨가 눈치 못 채게 사알짝 떼어내야 할까, 아니면 “아가씨, 뒷덜미에 검불이 붙었네요” 하고 일러줘야 할까. 어쩌다 문간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순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바라보는 사이, 그러면 그렇지, 그 까만 점이 툭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앗,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떨어져버린 줄만 알았던 고 조그마한 점이 깊숙이 패인 티셔츠의 말기를 따라 사알살 기어 올라가는 게 아닙니까. 분명 뭔가 작은 벌레 같았습니다.

저걸 어쩌지.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덜커덩 버스 문이 열리며 아가씨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내려버렸습니다. 아, 나는 그 아가씨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런 방책도 생각해내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 머리에 콕, 꿀밤을 먹였습니다.

어느 해였던가, 그 때도 지금 같은 장마철이었습니다. 저녁나절엔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에 사무실에 두었던 큼직한 우산 하나를 챙겨서 퇴근길에 나섰습니다. 광화문 옛 국제극장 앞 정거장은 도로 정비를 제대로 못한 탓인지 기묘하게 보도와 차도 사이에 몇 개의 계단이 생겨 있었습니다. 계단 위쪽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과연 후드득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나는 재빨리 우산을 펴들었습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갑작스런 빗소리에 이리저리 몸을 피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때마침 계단 바로 아래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내가 받친 우산 그늘 덕에 비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능하면 두 사람이 모두 비를 맞지 않도록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어-, 모두들 비를 피하느라 야단인데 기이하게도 자신의 머리 위로는 비가 쏟아지지 않는 게 이상했던지 아주머니가 힐끗 올려다보다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 눈으로 고마운 인사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참이나 버스를 기다리느라 그처럼 서 있는 게 다소 어색했던 모양입니다.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우산을 나눠쓰려고 않던데…요”하고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혹시라도 무안해 할까봐 얼른 “네, 저도 용기를 좀 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다 그러고 싶어도 쑥스러워서 잘 못하거든요”하고 대꾸했습니다.

이윽고 아주머니가 기다리던 버스가 왔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럼…”하고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버스로 달려갔습니다.

그 버스는 내가 기다리던 버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아주머니를 따라 버스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한참이나 더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탔습니다. 그게 우리네다운 염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살다보면 언제나 주고받게 마련이지요. 그 후 어느 날 막 버스에 올라탔을 때였습니다. 승객이 꽤 많아 도리 없이 문간에 손잡이를 잡고 섰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앞자리에 앉았던 한 아주머니가 “저기…바지가 열렸어요” 하고 내 바지 앞자락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까. 아, 그 때의 난감함이란. 그리고 그 아주머니의 용감함이란.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엉거주춤 돌아서서 내 주책스러운 바지 앞자락의 지퍼를 끌어올렸습니다.

검정 티셔츠의 아가씨를 그대로 보내고 타고 가던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온갖 상념 속에 용기 없는 자신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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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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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 (121.XXX.XXX.105)
비오는 날은 비를 피하느라 바삐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는 어찌할까 맘속으로만 엄청 고민고민하다 결국 용기를 못내고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참 신기하죠? 왜 용기가 안날까요? ^^ 민망함을 미리 겁낸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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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17: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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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성 (121.XXX.XXX.234)
젊고 진솔한 마음을 지니고 계시군요.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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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9 14: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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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ddulnal (168.XXX.XXX.66)
글쓴이의 자상한,,조금은 설익은 듯한 마음이 보입니다.다음엔 적당히 생각하시고 말을 거세요,,,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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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9 10: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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