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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김흥숙 2007년 06월 21일 (목) 09:37:29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여자들만 있는 환경에서 공부한 사람이 직장에 나가면서부터는 홍일점 노릇을 많이 했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니 남학생들과 한 교실에 있었으면 그나마 조금 하던 공부도 하지 않고 남자들에 대해 연구만 했을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남녀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차이를 설명해주는 책들이 흔하지만 제가 성장하던 시절엔 그런 책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니 남자를 보는 제 시선의 뿌리는 직접 경험이나 지식보다는 문학 작품과 영화 속 인물들입니다.

게리 쿠퍼를 좋아하는 건 시오노 나나미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 글과 같은제목의 책에서 게리 쿠퍼야말로 자신에겐 “마음의 사나이”라고 고백합니다. 키가 크고 친절하며, 성실하고 정직하여 배반하지 않고, 미남이며 움직임이 빠르지 않아서 좋아한다고 합니다. 저는 큰 키는 채우기 힘든 물통 같은 것이며 누구나 보고 반하는 아름다움은 삶을 낭비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게리 쿠퍼를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무엇보다 그의 눈빛을 좋아합니다.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조차 그 여인의 피부와 눈, 코, 입 너머 속내를 뚫어 보는 것 같은 깊은 눈. 총잡이와 마주 서서도 그 사나이의 배경을 이루고 선 하늘과 지평선을 보는 것처럼 먼 시선. 그의 눈엔 언제나 지친 사람을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 주는 듯한 따스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과 냉정이 보입니다.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서 묻어 나오는 품위입니다. 좋은 상황일 때나 나쁜 상황일 때나 서두르거나 경박해지는 법 없이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의 움직임이 빠르지 않아 그를 좋아한다고 할 때 그건 그가 품위 있어 좋아한다고 하는 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밖 세상엔 게리 쿠퍼 같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 20대, 30대 남자들은 용기는 물론 만용까지 부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남자들 중엔 먹고 살기 힘든 현실을 탓하며 일찍부터 길들여진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 보니 여자를 기쁘게 할 줄은 알아도 여자의 존경을 받는 남자가 되진 못합니다. 여성이 제기하는 이혼이 많은 게 당연합니다. 존경의 받침을 받지 못하는 사랑은 겨울 밤처럼 짧으니까요.

중년과 노년의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눈물이 많고 삐치기도 잘합니다. 줄어드는 테스토스테론 탓이거니 이해를 하면서도 답답합니다. 마음씨 좋은 여자들은 약한 남자들을 귀여워하고 사랑해주는 모양이지만 저 같이 못된 여자들은 사랑할 남자 찾기가 갈수록 어렵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이 많아지는 게 쉬이 이해됩니다.

재미 있는 건 약한 남자일수록 엉뚱한 방식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시민들이 힘 없는 이민자들을 괄시하듯 약한 남자들은 주변의 힘 없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직장에서 여성과 하급 직원을 폄하하는 남성 상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남자로서 매력이 없습니다.

미국 국무부가 지난 주에 발표한 세계 인신 매매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와 태평양 군도에서 이뤄지는 미성년자 성 관광 (child sex tourism)의 주 고객이 한국 남성들이라고 합니다. 오죽 무능하면 자신과 동등한 성인과 즐거운 관계를 갖지 못하고 무력한 어린이들에게 왜곡된 성욕을 풀어놓을까, 한심하고도 불쌍합니다.

지금 청년기를 지나고 있는 남자들이라면 단 몇 편이라도 좋으니 게리 쿠퍼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 안되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하이 눈”만 보아도 좋겠지요. 60년 동안 100편이나 되는 영화에 출연하고 아카데미상을 두 번씩 받으면서도 수없이 많은 사랑에 빠졌던 쿠퍼에게서 멋진 남자란 어떤 남자인지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중년과 장년의 황혼 속을 걷는 남자들은 쿠퍼의 영화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건 오직 한가지뿐이니까요. 호르몬으로부터의 자유 말입니다. 일생 동안 자신을 옭아매어온 테스토스테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을 자축하며 그 동안 간과해온 자신 속의 평화와 위대함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마침내 남자(man)와 여자(woman)의 이분법을 벗어나 인간(human)으로 살아갈 때가 왔으니 말입니다.

입을 다물고, 천천히, 황혼 속을 걷는 남자는 이미 쿠퍼입니다. 물론 바지 주머니엔 한 손만, 오직 한 손만 넣어야 합니다. 쿠퍼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때맞추어 부는 바람이 그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날려주면 더 좋겠지요.

이 여름, 쿠퍼의 눈빛을 보고 싶습니다. 더위에도 햇빛에도 아무렇지 않은 서늘한 시선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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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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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169.XXX.XXX.21)
이 글에 뭔가 근사한 댓글을 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깊은 통찰력으로 남자들을 불러주어서 첨언이 오히려 누가 될 것 같군요.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과 존경하는 것의 차이를 깨닫는데 40여년이 걸렸습니다. '결코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남자, 다른이들의 경박함을 유머로 희화화 하는 남자, 항상 내곁에 있는 그에게 이 댓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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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6 11: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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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edtree (121.XXX.XXX.190)
이 밑의 해뜰날이 어느 분인지 궁금하군요. 여러 군데 등장하시는데...
앞으로도 매일 들어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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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5 23: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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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ddulnal (168.XXX.XXX.66)
"사랑은 겨울 밤 처럼 짧으니,,,"란 반어적 표현이 많은 의미를 갖고 잇네요. 뭔가 큰 기대를 갖게 하는 바램은 길고 오래 가리라고 바라지만,그런 바램이 클 수록 현실은 항상 반대로만 가지요?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게리의 깊고 우수에 찬 듯한,때로는 너무 소심한 듯한, 눈은 게이블(클락)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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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2 11: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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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te (211.XXX.XXX.22)
송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데 혹시 더위로 잠 못 이루는 여름 밤이 자꾸 길게 느껴져서 겨울 밤이 오히려 짧게 느껴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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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2 00: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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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광섭 (58.XXX.XXX.170)
"겨울 밤차럼 짧으니까요" 하는 대목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밤이 제일 긴 동지느 겨울에 있어서 "동짓달 기나긴 밤을...."하는 시조의 한 대목도 있구요. 그렇지만 잠간 밀이 헛나간 "slip of tongue" 정도로 보고 글 전체의 흐름이나 문맥을 놓지지 말기를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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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1 13: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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