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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 선생
방석순 2007년 06월 15일 (금) 02:30:41

    =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

선생님의 호칭은 손오공입니다. 실제로 성함을 모르는 친구들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 선생님도 제자들의 초청에 응하면서 “그래, 아예 초청장에다 손오공이라고 써라”고 용인해 주셨답니다.

당시 나라 사정이 그러해서인지 학교엔 도회 변두리나 두메산골의 가난한 집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여느 학교처럼 말썽꾸러기들도 많았습니다. 그 말썽꾸러기들에게 손오공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손오공 떴다!”하면 모두들 쥐구멍을 찾았으니까요.

한 친구의 추억담입니다. “두 놈이 뒷간에 들어가 꽁초를 교대로 빨고 있었지. 아, 그런데 손오공이 떴다는 거야. 문 열고 나갔다간 금세 들통 날 거고. 꼼짝 못하고 그 구린내 나는 데서 버티고 있었지.”

그랬더니 바깥에서 문짝을 꽝꽝 때리더랍니다. “야, 이놈들아. 빨리 나와”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입으로 하하 담배 기운을 내뿜고 문을 열고 나갔더니, “임마. 다 알아!” 하면서 후크 한방을 먹이더랍니다. 순간 둘은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아프기도 했지만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나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선생님은 이 불량학도들을 교무실로 끌고 가서 자술서 쓰게 하고 정학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초임이던 젊은 선생님의 열정과 사랑이 불쌍한 제자들을 구제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긴 했어도 학창 시절의 추억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가정형편 때문에 여러 분기 수업료를 못 내고 장기간 무단결석까지 해서 학업을 포기할 뻔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동안 자포자기 심정으로 신문배달로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집안 어른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에 나갔으나 수업일수가 모자라 유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 간다는 보장도 없는 마당에 고등학교라도 일찍 마치고 취직해야겠다고 작정했던 그에게 ‘유급 통보’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해 담임이던 손오공 선생님 자택을 찾았습니다.

“교무회의에서도 네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하고 선처를 바랐지만 결석일수가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결정된 걸 이제 와서 번복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망연자실 앉은 친구가 너무 딱해 선생님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도 한마디 해주셨습니다.

“차라리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면 어떻겠니? 지금 네 성적이나 집안 사정으로 봐선 진급한다 해도 대학가는 일이 어려울 거야. 오히려지금부터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한다면 어떤 희망이 생기지 않겠니?”

선생님의 이 말씀에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친구는 당시를 회상하곤 합니다. 잠시 감전된 듯 앉았던 친구는 벌떡 일어나 “알겠습니다. 선생님, 저 공부하겠습니다” 하고 큰절을 올리고 물러나왔습니다.

한 학년 아래 후배들 틈에 끼어 친구는 점심을 거르고 저녁엔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매일 밤 10시까지 도서관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덕분에 한 해 늦어졌지만 남들 다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적성이 맞지 않는 직장에서, 또 예기치 못한 외환위기로 몇 차례 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전화위복’이라던 손오공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였습니다.

동창의 소개로 친구는 늦게나마 정말 마음에 꼭 맞는 일을 찾아 지금까지 즐겁고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동창회 일이나 친구들 일에 누구보다 앞장섭니다. 당연히 손오공 선생님을 모시는 데도 가장 적극적입니다.

그 친구의 딸이 시집가던 날 손오공 선생님이 친히 참석하셨습니다. 많은 동창들도 모였습니다. 선생님은 뒤풀이로 술이 거나해진 제자들의 테이블을 일일이 돌면서 안부를 물었습니다. 자주 뵙지 못했던 한 친구가 선생님께 던진 인사말이 그날 축하연을 완전히 뒤집어놓았습니다. “응, 나 박명국(가명)인데, 너 이름이 뭐더라?” 그 자리에서 서너명이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답니다. ‘띠동갑’인 선생님이 너무 정정하셨던 탓입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한 친구는 선생님께 면구스러워서 핑계 김에 “어이, 모두 불 꺼!”하고 소릴 질렀습니다. 선생님은 이내 “괜찮아. 나도 한 대 줘봐”하고 담배를 입에 물고서는 혼사를 맞은 제자에게서 들었다는 당신과의 옛 추억담을 되풀이했습니다. 정작 축하주에 취한 혼주는 그 옆자리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수십년간 수만명의 제자들과 만나고 헤어진 선생님들께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만큼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지요. 어떤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고 어떤 일은 꿈속같이 희미하고. 그러나 당신들께서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말씀 한마디가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모교 교정에서 동창회가 열린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많은 동기생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해 옛 교실도 돌아보고 ‘꾀꼬리동산’이라 불리던 교내 숲도 거닐어 보았습니다. 선생님도 여러분 참석해 정다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손오공 선생님은 그날 흥에 겨워 ‘친구여’를 열창했습니다. 그 옛날 말썽꾸러기들이 떼로 몰려나가 선생님과 어깨동무하고 '친구'를 합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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