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글연구소’의 특별한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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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글연구소’의 특별한 수업

방석순

2012년 03월 02일 (금) 00:48:39

황양혜(黃良惠) 선생은 일본에서 한국, 한국 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후지산(富士山)을 등지고 태평양을 바라보는 시즈오카현(靜岡縣) 하마마쓰시(浜松市) 중심가, 도심 치고는 의외로 조용한 골목에 이들의 공부방 ‘황＊글연구소’가 있습니다. 3년 전 시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관광음식점 자리에다 아담한 건물을 짓고 양혜 선생이 마련한 공부방입니다.

물론 양혜 선생의 한국어 강의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열아홉 꽃띠에 모국을 찾아와 우리말 배우고 대학을 마친 후 태어난 땅 일본으로 돌아가 줄곧 우리말을 가르쳐 왔습니다. 시즈오카신문사 문화센터에서부터 지금의 ‘황＊글연구소’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르친 제자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현재 ‘황＊글연구소’에서 공부하는 제자는 대략 30여 명.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요일별로 반을 나누어 매일 우리말 공부가 이뤄집니다. 연령도 수준도 다양합니다. 30대 처녀 총각에서부터 60, 70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또 사과, 인형, 자동차 등 이제 겨우 사물의 이름을 외우는 걸음마단계서부터 경주, 공주, 부여 등지를 탐방하고 “무열왕릉 비석 아래 왜 불쌍하게 거북이가 엎드리고 있느냐”고 귀부(龜趺)의 유래를 묻는 학구파까지.

지난달 양혜 선생은 제자들을 위해 특별한 수업을 준비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수업을 오래 지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초 그는 갑작스런 병세의 악화로 지옥과 같은 투병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주치의는 이제 병실을 떠나 호스피스 같은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했답니다. 유방암이 장기를 거쳐 뇌에까지 전이된 것입니다.

양혜 선생은 그래서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한국어 교재로 활용해온 자유칼럼의 필자들을 초청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제자들, 한국, 한국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하는 일본의 좋은 분들과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우리 교실에서 실제로 (필자들의) 이야기, 목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사는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 분들인지 자랑하고 싶어요. 덕분에 잘 살았다는 걸 느끼고 싶어요. 제 목숨을 볼모로 하는 것 같아 민망한 생각도 들지만 숨 붙어 있을 때 보고 싶어요. 눈 감은 다음 쓰레기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한 번 왔으면 누구나 다 가는 거잖아요? 저는 언니, 아저씨 추억 안고 멋지게 훨훨 떠나고 싶어요. 우리 남편이 절 화장해서 지구촌 어디엔가 좋은 곳에 뿌려주겠답니다.”

양혜, 그는 35년 전 꽃 같은 처녀 시절 우리말을 배우러 서울에 왔을 때 철없던 새댁 제 아내가 불러들인 하숙생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난해 11월 제자들과 함께 명동에서 저녁을 먹을 때만 해도 ‘명랑 쾌활’, 그 자체였었는데. 메일을 읽으며 친동기처럼 지내온 아내는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렸습니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지만 난 다시 카운트업할 거예요. 갈 때도 씩씩하게~! 웃으면서 파이팅~!! ＼(^o^)／”

이런 게 바로 ‘양혜 식’ 사고요 생활이요 메일입니다. 마치 채플린의 무성영화처럼 그는 늘 저희 부부를 웃기고 울리곤 했습니다. 벌써 8년 전 암이 발견됐지만 줄곧 치료와 일상, 한국어 강의를 병행해왔습니다. 몸은 갈수록 수척해졌지만 찡그린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늘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강의하고 또 제자들과의 서울 나들이를 계속했습니다. 아마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이 병마를 제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마마쓰에서의 행사일정 논의 며칠 후 급전이 날아들었습니다. 양혜 남동생이 간신히 찾아낸 제 휴대전화로 알려왔습니다. “지금 의식이 불명확하고 의사소통도 어렵다”고. 당연히 예정됐던 행사 진행도 어려우니 그저 문병차 와 주면 좋겠다고. “시한폭탄이 터졌어요,” 장난처럼 말하더니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는 것일까.

시즈오카 공항에서 하마마쓰로 가는 리무진버스에 오르며 “누군가 곁에서 받아 주겠지” 하고 양혜 휴대전화를 불러보았습니다. “아저씨?” 뜻밖에도 양혜 목소리였습니다. 하마마쓰 버스 터미널에 마중 나오겠다는 거였습니다. “무슨 소리? 우리가 어디든 찾아갈게요.” 아내도 저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하마마쓰에서의 며칠 동안은 깜짝쇼의 연속이었습니다. 터미널엔 착한 남편 하루(伊藤晴康) 상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양혜가 직접 나타났고, 숙소로 가는 길목에선 10여명의 제자들이 환영 플래카드, 반짝이를 들고 나타나 저희 부부를 놀라게 했습니다.

양혜 선생의 휠체어를 밀고 처음 방문한 ‘황＊글연구소’는 종일 안부를 묻는 제자들의 발길로 부산했습니다. 반갑다며 끌어안고 문간을 나서다 얼굴 부비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다시 끌어안고. 그렇게 한국식 정(情)과 일본식 예(禮)가 뒤범벅된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양혜 선생이 평소 이들에게 전수하는 건 우리말만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더듬거리는 우리말 실력을 부끄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자들의 열의는 몇 십 년 동안 기초 일본어교본 20과를 반복해온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날 밤 양혜 선생은 치료 때문에 빼먹은 수업을 벌충한다며 밤 10시까지 제자들을 붙들어 앉혀 또 한 번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황＊글연구소’가 마련한 친교의 시간. 간단히 자유칼럼 소개도 하고, 양혜 선생의 대학 선배인 임철순 자유칼럼 공동대표의 영상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제 아내의 심통이라니, 양혜 내외를 위로하고 격려한답시고 하모니카를 불더니 그예 두 사람을 다 울리고 말았습니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저녁엔 마인 슐로스라는 맥주집에서 환송연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양혜 선생의 생일잔치라도 되는 양 형제, 제자들로 큰 방 하나가 차고 넘쳤습니다. 이 시끌벅적한 자리가 누구의 무얼 위한 것인지, 한동안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감동일 수도,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양혜 선생과 일본인 제자들의 깊은 교감을 지켜보면서 그의 일생이 얼마나 의미 있고 보람된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의 인연을 고리로 가던 날과 마찬가지로 떠나던 날에도 버스 터미널까지, 공항까지 따라 나오며 손수 만든 케이크를 쥐어주고 책, 복권, 과자, 인형 선물을 안기던 하마마쓰의 새 친구들에게서 인사치레 이상의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방사선 치료 끝내고 머리에 전이된 암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ㅋㅋ 이제 시계가 없어도 삽니다. 내 몸 속에 ‘수명 시계’가 있어서 나를 흔드나 봐요. 그러나 난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은 내 맘대로. 파이팅!!!”

양혜 선생은 오늘도 씩씩하게 수업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다리를 놓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