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의 향수(鄕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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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의 향수(鄕愁)

황경춘

2012년 02월 08일 (수) 00:38:17

어릴 적 기억으로, 일제의 우리 전통문화 말살 정책 중 서민이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것의 하나가 음력 사용 금지였습니다. 고종의 개화정책으로 양력이 도입되었지만, 오랜 전통의 음력은 한일합방 후에도 서민생활에 밀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태양력의 실시가 철저하여, 3월 삼짇날, 5월 단옷날, 7월 칠석날 그리고 중추명월의 추석까지도 양력으로 지냅니다. 심지어 부처님 오신 날도 양력 4월 8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나 행정당국의 지도와 감시가 심했지만 여러 전통 민속행사는 여전히 음력을 기준으로 했고 설 대목장은 보통 때 5일장과는 딴판으로 크게 붐볐습니다. 식량 사정이 극도로 나빴던 1940년대 초반 중학시절의 하숙집에서도 설에는 별식이 마련되었습니다.

일정 말기에 생일이나 제사를 양력으로 지내는 집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우리 고향 마을에서는 모두 음력 위주였습니다. 우리 집 음력 정월은 특히 바빴습니다. 설과 정월 대보름의 두 명절 외에, 공교롭게도 저와 동생의 생일이 음력 정월에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습관 그대로 광복 후에도 우리 집 생일은 계속 음력으로 지내오다가, 1960년대 초에 양력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버지가 제 생일 바로 다음 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생일은 양력으로 하고 부모님 기제사는 음력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에게 음력은 부모님과 옛 시골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항상 불러일으킵니다. 학교 부형회(지금의 사친회)나 지역사회활동이 비교적 많았던 아버지는 설에는 표면상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맡겼습니다. 어머니는 머슴, 친척 그리고 이웃 도움으로 장보기와 방앗간 일 등 모든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 집 명절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막걸리였습니다. 세무서원의 밀주 단속이 심했지만, 애주가인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막걸리를 손수 만드셨습니다. 막걸리를 몰래 만들다 들켜 벌금을 내는 동네 사람이 가끔 있었지만, 우리 집은 한 번도 단속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객지인 진주에서 보낸 중학(현 고등학교) 생활 5년 동안 저는 설과 생일을 한 번도 집에서 보내지 못했습니다. 일제 때 학제는 겨울방학이 양력설 앞뒤 2주뿐이어서 설과 생일은 언제나 방학이 끝난 뒤에 하숙집에서 맞이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짧은 겨울방학 동안이나마 맛있는 음식을 아들에게 먹이려고 항상 노심초사였습니다.

일제강점 하 마지막 설은 고향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敗色)이 짙어지고 백성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학도병 특별법으로 도쿄(東京)에서의 공부를 중단한 저는 고향에서 징병검사를 마치고 ‘아카가미(赤紙)’라 불린 소집영장 오기만 기다리던 우울한 나날이었습니다. 가끔 우편배달부가 나타날 적마다 온 가족의 마음이 얼어붙었던 때입니다.

아무도 겉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1945년이 시작되자 이번이야말로 제가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설이 될 거라고 가족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식량사정 중에도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쑥떡을 비롯해 많은 설빔을 준비했습니다. 설 다음 날인가, 어머니가 “이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니, 네 생일이나 지나고 날씨나 따뜻할 때 왔으면 좋겠다”고 ‘저승사자’라고도 불린 그 소집장 얘기를 조용히 꺼내셨습니다. 저의 생일은 음력 정월 22일입니다

그 소집장은 정월 대보름이 지난 이틀 후인가에 배달되었습니다. 용산사단 입대일은 양력 3월 10일로 제 생일 나흘 뒤였습니다. 경상도 식으로 신선한 도미를 넣어 끓인 미역국 등 생일 음식을 장만한 어머니 마음속을 헤아리며 제 가슴은 찢어질 듯 아렸습니다.

다행히 전쟁은 그해에 끝나 35년 만에 광복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온 저는 가족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 설’을 즐겼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미 군정청 분견대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물자는 여전히 귀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공출이 없어 식량 사정은 많이 좋아지고, 떡 많이 만든다고 간섭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미군에 부탁해 당시로는 귀한 양주, 맥주, 초콜릿 등을 사서 어머니가 마련한 설빔을 돋보이게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애주가인 아버지와 이웃 친지들을 제가 번 돈으로 마련한 술로 대접하였습니다.

저의 시골 마을은 외가를 비롯하여 함안조씨(咸安趙氏) 집성촌이어서, 한 40호 될까 말까하는 동네에 어머니 친척이 무척 많았습니다. 대나무 밭으로 이어지는 넓은 옆 뜰에는 텃밭도 있어 어머니는 객지에서 일하는 자식들 걱정 외에는 별 불편 없이 시골생활을 즐기고 계셨습니다. 장자인 저의 서울 생활이 안정되자 서울로 모시겠다고 가끔 하는 저의 제안이 평화로운 어머니 마음을 흔들어놓을 뿐이었습니다

의료시설 부족, 교통 불편, 그리고 노년기로 접어드는 부모님 나이 등을 설명하는 저의 설득에 외향적인 아버지는 쉬 동조하셨지만, 어머니의 조용한 반대는 꽤 끈질겼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결국 서울로 모시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쉽게 도시생활에 익숙해지셨고, 당시로는 희귀병이던 암이 발견되고도 힘자라는 데까지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환경의 변화에 약간 불편함을 느끼시면서 손자들과의 나날에 무료함을 달래시다가 뇌졸중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기회도 없이 떠나셨습니다.

임진의 새해 벌써 대보름이 지나고 제 음력 생일 즉 아버지 기제사가 가까워지니, 옛 시골집에서의 여러 일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리고 효(孝)라는 명제(命題)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시골에서 서울로 모신 어머니ㅏ 가끔 고향을 그리워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 세상 같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바르게 모시는 선택이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기록적인 한파로 고장 난 10년이 넘은 가스 보일러를 바꾸는 도중 언젠가 선물로 받은 일본 술 한 병을 발견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부족한 것이 많았던 것을 기제사 때마다 통감합니다. 이번에도 음복을 하며 때늦은 반성을 많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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