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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노래
김창식 2011년 05월 19일 (목) 01:49:53

푸른 오월. 아세요? 오월의 나무엔 작은 물고기들이 산다는 걸. 바람이 일 때마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차르르르 초록물고기 떼처럼 반짝였죠. 아침 공기에 섞여 싱그럽고 배릿한 풀냄새도 끼쳐왔고요. 1980년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해였습니다. 그해 봄 나는 직장생활 7년 차 신임과장으로 진급하여 미혼 노총각이라는 점만 빼곤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답니다.

나는 회사의 상징 그림인 '고니'가 그려진 통근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죠. 어느 날 출근길에 그녀를 처음 보았지요. 새로 이사 온 것인지, 전부터 출근버스를 이용했는데 못 알아본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아무튼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마음속에 들어와 앉았군요. 출발지에 가까운 정류장인지라 버스에 오르니 여느 때처럼 빈자리가 많았어요. 굳이 그녀 옆자리에 비집고 앉는 것이 멋쩍었지만 그날은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앉았죠.

그녀는 긴 머리에 항상 고개를 숙여 책을 읽고 있는 단아한 모습이었답니다. 매끄럽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그날은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더군요. 곁눈질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옆 사람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을 읽고 있어요. 에세이나 교양서적일 터인데 책을 읽는 모습이 웬일로 처연해 보이더군요. 나는 무슨 이야기로 말을 걸까 궁리했죠. 무슨 책이에요? 아니면, 어느 부서에 근무하세요? 자연스럽긴 하지만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그럴 듯하면서도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 거리가 없을까.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유머와 에스프리가 담긴.

그때 버스에 설치된 라디오에서 긴급뉴스를 알리는 안내 방송에 이어 아나운서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쪽 일원에서 시작된 폭동이 일부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정부는 더 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며칠째 계속 중인 국가 현안에 대한 속보를 전하고 있는 것이죠. 국민을 지키는 것이 존재 이유인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공격한다는 것이에요. 마음속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어요. 보도 통제가 되고 있지만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을 뿐더러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죠.

버스 안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더군요. 승객 모두 지리적으로 떨어진 가상공간의 일로 치부하고 그러려니 여기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짐짓 못 들은 체하거나. 깊은 바다 속처럼 침묵이 자리하는 가운데 누군가 자리를 고쳐 앉는지 의자의 삐걱거림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려왔어요. 차창 밖으로 침침한 눈길을 돌리니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깨어나 서걱거리더군요. 김광규 시인의 시에서처럼.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버스가 큰 원을 그리며 속력을 줄이는 것이 목적지에 다다른 모양이에요. 나는 시린 상념에서 깨어났죠. 아울러 그녀에게 아직까지 말을 건네지 못했음을 깨달았어요. 나는 그녀에게, 아니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답니다. 입안에 서걱거리던 모래가 메마른 입 주위를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부끄러운, 참으로… 부끄러운 세월이에요, 그렇죠?"
그녀가 읽던 책을 덮으며 언뜻 나를 쳐다보는 듯싶었어요.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고요. 이윽고 차가 회사 마당에 멈추어 섰죠.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며 내릴 채비를 했죠. 사내 방송을 통해 귀에 익은 라데츠키 행진곡이 들려왔어요.

살다보면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감히 꿈꾸지 못한 일이 뜻하지 않게 이루어지기도 하더군요. 나는 통근버스에서 책을 읽던 그녀와 그해 말 결혼했죠.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스산한 바람이 일어 꼬리 긴 호루라기 소리를 내던 11월 하순 어느 날이었습니다. 루나 예나*. 30여년이 흐른 지금 나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그녀의 얼굴에서 푸르게 빛나던 오월의 젊음을 보아요. 오월이여, 부디 너의 노래 들려다오! 우레보다 더 큰 침묵의 노래.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하려는 내게.

* 루나 예나(Luna Llena): 만월(滿月‧The Full Moon). 라틴 그룹 '로스트레스 디아망테스'가 부른 노래.
우리나라에선 번안 제목인'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더 잘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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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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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215)
글만 감미롭게 잘 쓰시는 줄 알았더니, 연애담도 곁사람들을 부럽게 하시네요. 거기다 결혼까지 하시게 되었다니 참 복도 많으신 두 분입니다. 늦었지만 (너무???) 축하합니다. 글에서 언급하셨듯.... 정부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결국 시위대에 발포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극보수파라는 몰염치한 비양심집단이 5.18 민주화 운동에대해서 북한 공작원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덮어씌우는 작태앞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한숨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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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9 18: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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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5월 이맘 때만 되면 한층 부끄럽고 가슴아픕니다, 김윤옥님.
거대한 허구와 거짓의 시대에 살며 어쩔 수 없이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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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0 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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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112.XXX.XXX.231)
해마다 이때쯤이면 반드시 생각나고, 영원히 잊지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시겠습니다. 김 작가님 자당께서 오랜 세월, 중병으로 누워계실 때, 어부인께서 정성을 다하여 병 수발을 드셨다는 감동적인 사연도 언젠가 들은 적 있었습니다. 효부이시니까, 더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이 있는데.... 결혼 30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통근 버스에서 첫 목격?..새로 이사 오신거지 아니면 전부터 통근 버스를 이용했는데, 못알아보신건지? 정도는 물어 보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기왕에 내 사람되었으니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으셨나? 양쪽 집이 가까와서 연애 기간은 비록 짧았었지만 재미가 많으셨겠습니다. 저도 그랬기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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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9 14: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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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happy님도 그러셨군요. 그러고보니 저도 아직 물어보지 못했군요.
저는 가끔 힘겨운 일 후 잠든 옆 사람의 얼굴을 보며 저 자신에게 중얼거린답니다. 나쁜 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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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0 14: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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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112.XXX.XXX.231)
와우! 감동이네요. 김 작가님의 여전한 착한 마음씨... 그러나 이제는'은근과 과묵'은 더 이상 '金'이 아니라고합니다. 어제는 '부부의 날'이었잖아요? 마음에만 담아두지마시고, '말과 행동'으로 따뜻한 사랑을 표시(힘겨운 일을 하고났을 때,손을 살짝 잡아주며,"당신, 많이 힘들지? )해 보세요. 제가 좀 오버했나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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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2 07:5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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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243)
happy님 말씀이 옳습니다.. 손 아니라 더한 것도 잡아둬야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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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2 11: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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