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쉬운 시를 위하여
임철순 2011년 05월 12일 (목) 00:33:00
편운(片雲) 조병화(趙炳華ㆍ1921~2003)는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등단한 이후, 54년 동안 무려 52권의 시집을 낸 분입니다. 신작시집 외에 시선집과 수필집까지 합치면 그가 낸 책은 160 권을 넘습니다. 이런 다작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1985년에는 한 해에 시집을 세 권이나 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시를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 생활의 광범한 문제에 쉬운 일상의 언어로 접근한 덕분입니다. 그는 평이한 말로 독자들과 솔직하고 친근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현대시는 난해해야 하며 현대시는 팔리지 않는다는 고고한 통념을 깼습니다. 열다섯 차례나 개인전을 열었던 시감각(視感覺)과 회화적 재능이 저절로 쉬운 시를 쓰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미리 썼던 묘비명 <꿈의 귀향>도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알기 쉽게 돼 있습니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의자>였습니다. 그 시가 의자를 주제로 한 연작 중 제 7편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모를 말이 하나도 없이 쉽고 주제가 분명하며 같은 말이 적절히 반복되는 조병화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는 그의 시가 시시하고 싱거웠습니다. 시를 그렇게 많이 써대니 좋은 작품이 나올 리가 있겠느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시하고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편안하고 쉽게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뜰 때까지 그렇게 섬세한 감수성과 언어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13~14일 이틀 동안 경기 안성시의 조병화문학관에서는 제 8회 조병화 시축제가 열립니다. 이 행사 소식을 들으면서, 그렇게 많은 시를 썼는데도 끝내 가시지 않았던 고독과 허무와 낭만에 대해서, 그의 시작활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조병화와 그의 시를 생각하게 된 구체적 계기는 최근 김규동(86) 시인의 자전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김규동 씨는 조씨와 정반대라 할 수 있을 만큼 과작의 시인입니다. 첨삭에 첨삭을 거듭하며 13년 만에 <느릅나무에게>(2005년)라는 시집을 낼 때, 이미 발표한 400편 중에서 83편만 스스로 합격시키고 나머지는 버렸다고 합니다. 남들이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이건 시가 아니다. 그땐 시로 알고 썼지만 13년 후에 보니 시가 아니라서 버릴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이 책에서 쉬운 시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꼽은 시인이 천상병(1930~1993)입니다. “나는 부산에 가고 싶다. 추석을 맞아서 누님한테 가고 싶은데 부산 갈 기차표 살 돈이 없다. 그래서 못 간다. 누님은 나를 많이 기다릴 텐데.”이렇게 재주 부리는 말도 없고, 말하고 싶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썼는데도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한 것은 시에 진심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시, 군더더기가 없고 핵심만 정확히 표현하면서도 천박하거나 통속적이지 않은 데 천상병 시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병과 달리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1926~1956)은 어려운 시를 지향했는데, 김규동 씨는 천상병과 박인환이 다 좋다고 말했습니다. 읽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으며 삶이 깨끗하면 작품에도 거짓이 없다는 것, 쉬운 시는 진실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살아 있는 시란 펄펄 끓는 감정이 담긴 시라는 것, 시인이 먼저 자기 시에 울어야 시를 읽는 사람도 따라 울게 된다는 것이 시업(詩業) 60년이 넘은 그의 지론입니다.

사실 난해시에 대한 반감과 반성은 이미 문단의 큰 조류로 자리잡았습니다. 60대인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씨는 읽기 쉬운 시를 지향하며 ‘극(極)서정시’라고 규정한 시집을 각각 냈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언어가 과소비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 이제 언어의 경제를 발휘하는 시가 필요하다는 이분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작은詩앗ㆍ채송화’ 동인들의 출발점도 난해시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요즘 인기가 높은 TV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재검증의 의미를 띤 말이라면 <나는 시인이다>는 시를 향한 정열과 순수한 마음으로 격동과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자존(自尊)의 선언입니다. 몸이 좋지 않아 이번 책을 구술할 수밖에 없었던 노시인이 하루 빨리 건강과 기력을 되찾아 더 좋은 시, 더 쉽고 친근한 시를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일 쓰기 어려운 시는 쉬운 시라고들 하는데, 김규동 시인은 지금도 펄펄 끓는 감정이 풍부하니 독자들에게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읽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6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채길순 (211.XXX.XXX.129)
어디 쉬워서 좋은 글이 시 뿐인가요? 임 주필님의 글도 쉽고 좋습니다. 홧팅
답변달기
2011-05-13 17:07:10
0 0
김윤옥 (210.XXX.XXX.215)
60 년대 70 년대 암울하던 시절 맘 속에 맴돌던 조병화시인의 詩

-가물에 물이 잦아드는 것도 모르고
살고 있는 물고기 처럼
조국과 역사가 자지러드는 곳에
너와 나는
살고 있다-
이 시가 생각납니다.
난해한 시에 대해서 김기택 시인은 술래잡기에 비유해서 너무 쉽게 들키면 싱거워지고 너무 오래 들키지 않으면 술래잡기가 끝나버린다고....
적당히 숨을 것을 주문했습니다.
답변달기
2011-05-12 23:39:46
1 1
임철순 (211.XXX.XXX.129)
참 재미있는 말씀이군요. 잘 보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기.
답변달기
2011-05-13 17:07:51
1 0
김휘동 (211.XXX.XXX.129)
담연 자네도 글을 아주 쉽게 쓰고 있어. 시를 쓰는 것에도 도전해 보게나.
답변달기
2011-05-12 11:12:38
0 0
차덕희 (121.XXX.XXX.159)
펄펄 끓는 감정!.
듣기 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시력이 않좋고 기운도 딸려서 소설보다는 시나 수필을 접하는데,절제된 언어의 힘을 느끼게 되어 좋던데요.
자연, 사람, 관념의 세계로 끓는 감정을 잊고 살은 듯해 (관조) 조금 흥분(자극)됨니다.
답변달기
2011-05-12 07:03:43
0 0
임철순 (211.XXX.XXX.129)
저도 그렇습니다. 사람 이름 외워야 되고 줄거리 놓치지 말아야 되고.
소설 읽기 피곤해요. 차라리 평론을 읽는 게 더 편하지요.
답변달기
2011-05-13 17:09:11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