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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盲 이대로 좋은가
김홍묵 2007년 03월 30일 (금) 07:41:21
이달 초 큰 아들 결혼식 날에 90세 되신 어머님이 별세하신 아연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행히 여러 친지 덕분에 양 대사를 무사히 치뤘지만 또 다시 황당한 일을 한번 더 겪어야 했습니다.

둘째 아들과 조카들이 결혼식 방명록과 상가 조위록을 정리하다 말고 황급히 SOS를 보내온 것입니다. 고등학교부터 외국 생활을 10년 넘어 한 아들은 그렇다 치고, 박사 학위까지 딴 조카까지도 봉투에 쓰인 한자 이름을 읽을 수 없어 큰 일 났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팔순의 작은 아버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노트북까지 동원해 만든 방명록과 조위록 리스트는 한 마다디로 엉망이었습니다. ‘희’자가 ‘휘’자로 ‘언’자가 ‘은’자로 ‘성’자는 ‘승’자로 둔갑해 일일이 봉투와 새로 대조하는 법석을 떨어야 했습니다.

한자는 읽을 수 있으되 한글 발음이 현대 어법에 맞지 않는 할아버지와 한자 음독을 못해 불러주는 대로 노트북에 수록한 손자들의 세대차가 일을 망쳐 놓은 꼴이 된 것입니다. 한자 세대와 한글 세대로 갈라진 조손(祖孫)간의 간극이 심각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군에 간 아들을 면회하러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전방 부대를 찾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아들 이름을 대고 주민등록증을 맡긴 뒤 승용차를 타고 면회실을 향해 연병장을 출발하려는 데 정문 보초병 한 명이 정신 없이 달려와 트렁크를 두드리며 차량을 세웠습니다.

약간은 언짢은 기분으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초병이 “성을 알겠는데 이름을 어떻게 읽습니까?”하고 물어 쓴웃음을 지었던 일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젊은 이들이 쓰는 용어 중 우리 세대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 많듯이 우리에게 일상화 되어 있는 한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해외 여행을 여러 번 다녀봤지만 필자에게는 중국과 일본이 가장 만만한 편입니다. 그 나라 말을 제대로 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한자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반풍수에 지나지 않지만 한자로 된 간판만으로 밥 사먹고 잠자리 구하는 일 쯤은 자신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 오면 한자는 쪼그라들고 국적도 알기 어려운 외래어 한글 간판이 온 건물과 거리를 뒤덮어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들이야 괜찮겠지만 한국을 찾는 외국인, 특히 중국과 일본인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글은 커녕 한글로 적어 놓은 외래어조차 읽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 관광객 중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가 중국 일본인인데도 그들이 와서 쉽게 길을 찾고 쇼핑도 하며 도락과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싸요 싸” “달러 바꾸세요” “단돈 1000원”하고 외쳐 대는 동남아 국가 상인을 닮을 필요는 없지만 간판만이라도 바꾸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리라 생각 됩니다.

최근 성균관대학 이명학 교수가 신입생 384명을 대상으로 한 한자능력 테스트 결과는 충격적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하는 학생이 78명(20%)에 이르렀고, 부모의 성함을 한자로 못쓰는 학생이 80%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한자맹(漢字盲)이 그렇게 많다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조어(造語)에 신통한 능력을 갖춘 일본은 한자든 영어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능숙하게 통용하고 있고, 중국은 많기도 하고 쓰기도 어려운 한자를 간체자(簡體字)로 만들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국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유독 한자를 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우수성을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로마는 모국어인 라틴어 외에도 그리스어를 상용화하여 대 제국을 용이하게 통치하였고, 인도의 불경이나 서양의 법률과 제도 학문이 극동에 도입 정착한 데는 한자라는 언어매체의 역할이 큽니다.

한자를 쓰는 것이 불공정 거래이거나 과거사 규명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 어휘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를 방치 말살하기 보다 우리 문화의 틀에 맞도록 개량하여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정치적 코드뿐만 아니라 문화적 코드를 잘 맞추면 국제화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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