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가 어느 국가의 원수였다면 지금 그 나라는 정치적 충격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혔을 지도 모릅니다. 해외순방 계획에 대한 책임론과 경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와 논평이 쏟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매스컴이 폭탄투하 지점을 도표로 그려가며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변위험을 모면했을 때 대통령 같은 권력자와 유엔사무총장 같은 국제외교 수장이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치는 차이인가 봅니다.

세계는 바그다드를 방문한 반기문 사무총장이 이라크 총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중 바로 50m 밖에서 터진 로켓폭탄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해프닝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라크 내무장관이 “그런 일은 일주일에 몇 번은 일어난다.”고 침 뱉듯이 말해버리는 것을 보면 이라크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튿날 이라크 부총리가 자살폭탄 공격을 받고 부상했을 정도이니까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올해 1월 1일 임무를 시작한지 100일이 채 안 됩니다만 그의 호된 신고식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임하자마자 유엔 개혁을 부르짖는 그에게 국제사회는 냉랭하기만 합니다. 개혁이라는 것이 밥그릇과 관련된 문제이니 한 나라나 국제사회나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는 국제분쟁에 정면으로 나서서 중재하고 해결해야 하는 헌장상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수단 다르프르 사태와 팔레스타인 문제는 국제사회로서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이슈이나, 한국 외무장관 경력의 반 총장에게는 정서적으로 생소한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그다드의 폭탄소동에 이어 그의 중동 방문은 분위기가 거칠었습니다.
그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 수단의 다르프르 지역에 국제평화유지군을 파견할 수 있게 수단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무바라크는 압력은 안 된다며 거절했습니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는 무바라크가 여러 가지 정치적 셈을 할 것인데 쉽게 들어줄 리가 없겠지요.
또 아랍연맹 정상회의에 참석한 반 총장은 중동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을 보아야 했습니다. 정상회의 주최국인 사우디가 반 총장 수행취재단에 포함된 이스라엘계 기자의 비자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팔레스타인문제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유엔사무총장으로서는 권위가 깎이는 일입니다.

“관운이 좋다” “가문의 영광이다” “국가의 자랑이다”라는 온갖 찬사를 받으면서 유엔본부에 입성했던 반 사무총장으로서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기대는 많이 받고 힘은 미치지 못하는 유엔수장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강대국끼리의 파워게임이 유엔의 한 쪽 무대라면, 지역과 종교를 블록으로 한 제3세계의 독특한 정서가 유엔의 밑바닥을 흐릅니다. 일생을 외교무대에서 보낸 반 총장이 이것을 모를 리야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갈등을 풀어갈 힘과 권능이 문제입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언제나 강대국의 세력균형의 영향을 받아야 했지, 비슷한 나라끼리 연대하여 블록의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국제협력 분야에서 인정받는 나라도 아닙니다. 반 총장에게 힘을 실어줄 한국의 영향력은 빈약합니다.

이제 반기문 총장이 의지할 힘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카리스마’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세계는 대단히 좁은 시장이지만, 유엔사무총장에게는 너무나 돌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투성이의 지구촌입니다. 그에게 로켓포를 쏘아대는 곳도 있지만 그의 조그만 행동일지라도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로켓포탄공격이 누구를 겨냥한 것이었든 간에 그에게 준 충격은 컸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직분을 다하기 위해 때론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인 직책이지만 유엔사무총장도 그런 범주의 지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기문 총장은 인류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슴으로 느껴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