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신아연 공감
     
마감은 나의 힘?
신아연 2010년 06월 10일 (목) 00:37:44

글이 잘 안 써지거나 아예 안 쓰고 싶을 때면 이따금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마치 남의 글을 검색하듯 인터넷 검색창에 제 이름을 친 후 떠오르는 글을 찾아 읽는가 하면 잡지나 신문에 난 글을 뒤적이기도 하고, 그간 낸 책을 떠들리는 대로 아무 데나 펴서 읽기도 합니다.

얼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참 많은 글을 썼습니다. 칼럼도 쓰고 르포도 쓰고 사진 에세이도 쓰고 번역글도 쓰고 콩트도 쓰고 마구마구 써왔습니다. 그런 자신을 돌아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징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쉼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지속적으로 글을 쓰게 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아직 아무도 안 물어왔지만 혹시 누가 저에게 글쓰기의 동기를 묻는다면 대답할 말도 준비할 겸 말입니다.

'주변에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관계의 회복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같은 거창한 동기로 글을 써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어이없고 맥 빠지게도 지금까지 제 글은 순전히 '마감'에 떠밀려서 나왔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질투는 나의 힘'이라 했지만 제게는 '마감은 나의 힘'인 것입니다. 기 시인이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다'고 했다면 '내 글의 내용은 마감에 쫓긴 기록뿐이었다'고 해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미당 선생이 자신을 키운 8할은 '바람'이라고 했다면 제 글을 키운 8할은 '마감'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마감'에 떠다밀리기는 비단 글뿐이 아닙니다. 공과금이나 전화요금, 보험료 등을 비롯해 각종 서류나 서식을 작성하고 제출할 때도 마지막 날에 가서야 처리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마감일까지 원고쓰기를 미루는 데서 비롯된 일상의 못된 버릇입니다.

의식을 하든 안하든 사람은 누구나 어떤 에너지에 의해 추진을 받습니다. 아비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을 추진력 삼아 소림사 칼잡이가 무술의 기막힌 경지에 도달하는 것처럼요. 어떤 사람은 질투나 경쟁심을 연료로 하여 에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좌절과 배신감이 어떤 행동과 목표를 집중적으로 몰아가거나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노리게 합니다.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과 순수한 이타심 같은 긍정적 에너지원은 구도와 구원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만 부정적 에너지의 펌프질이라 해서 반드시 구정물을 퍼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시기와 질투, 탐심과 욕망, 경쟁과 비교 등을 구태여 '부정적 에너지원'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이기심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지칭하기로 한다면 말입니다.

긍정적 에너지로 몰아가든 부정적 에너지로 충전되든 간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고 성취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어찌 '마감' 따위의 추진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마감'은 실상 어떤 형태의 추진력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치대고 드는 귀찮고 부담스런 존재를 일시적으로 떼어놓는 모호하고 수동적인 마지못한 몸짓일 뿐.

마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마땅히 해야 할 공부를 미루고 있는 고3생처럼 일상에서 노상 미적거리고 뭉개는 제 버릇이 바로 이 '데드라인'에서 연유했으니 이 버릇을 그대로 뒀다가는 그야말로 생을 잠식하는 '데드라인'이 될 것만 같습니다.

결코 깨어남이 없는 잠을 자듯, 깊고도 가없는 고질적 우울증에 걸린 듯, 게으름과 나태에 매몰된 타성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반성과 자각이 최근 들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입니다. 요즘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때'라고 격언이 비틀어졌지만 늦었어도 하는 수 없습니다. 그래도 고쳐 살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고치고 싶습니다.

실은 조만간 제 삶의 기반에 불어 닥칠 변화로 인해 이런 늦은 깨달음이 '떠밀리듯 왔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잘못 살아온 것을 깨닫고 고치고 다시 시작하는 데는 결코 '마감'이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 삶을 밀어 올리는 에너지원을 교체함으로써 밝고 건전하며, 투명하고 순박한, 생명력 넘치는 생활이 제 앞에 펼쳐지기를 진정 소망해 봅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6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양미란 (110.XXX.XXX.142)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나서 삶의 마감이 그리 두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스스로가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마감이라기보다 비움이지요… 한결 삶이 편한 합니다. 애독자로서 작가의 마감은 피부에 와닿진 않으나 작가님의 글쓰기 마감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랑합니다.
답변달기
2010-06-21 18:58:36
0 0
신아연 (110.XXX.XXX.142)
비움과 마감을 대비하신 양미란 님의 덧글이 와닿습니다... 자꾸자꾸 마감(마무리)을 하면 결국 비움을 체험하게 되겠군요...
답변달기
2010-06-24 19:15:21
0 0
안용식 (110.XXX.XXX.142)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답변달기
2010-06-21 18:57:47
0 0
신아연 (110.XXX.XXX.142)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10-06-24 19:14:11
0 0
홍윤진 (110.XXX.XXX.142)
수많은 마감속에서 살아온 시간이 있기에, 익숙한듯하면서도 항상 낯설기만한 마감이 있기에, 산다는 느낌을 ----, 영원히 끝나지 안는 마감을 위하여 긴 영혼의 숨을 몰아 쉬며는 또다시 마감이 오겠죠?
답변달기
2010-06-21 18:57:16
0 0
신아연 (110.XXX.XXX.142)
마감이란 말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수많은 마감을 하면서도 또다른 마감을 기대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답변달기
2010-06-24 19:13:50
0 0
김명임 (115.XXX.XXX.85)
아연님 그간 안녕하신지요?
여긴 남아공 월드컵 응원으로 빨간물결 투성이네요.
그곳은 초겨울로 접어들었겠지요?

저도 잡지에 있을 때 '에고 언제나 이 마감인생을 마감할수 있을까...?'
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강력한 마감인생을 살고 있네요.
글을 써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발등에 불떨어질 즈음에야 글이 써지는
경험을 해봤을 거예요. ㅎㅎ
마감 한번 끝낼 때마다 담달엔 이렇게 밀리지말고 미리미리 써두자
항상 다짐하지만 담달에도 여지없이 마감에 밀려 글을 쓰곤했죠.

그짓을 15년이나 하고나니 지금도 가끔 잡지마감 시절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더라구요. ㅋㅋ
암튼 이제 추운 계절로 들어설텐데 항상 건강하시고 마감에 밀려서 쓴
글일지라도 좋은 글 많이많이 써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또 소식 전할게요~~~~
안녕히!!!!
답변달기
2010-06-19 10:09:05
0 0
신아연 (110.XXX.XXX.142)
저는 담달엔 밀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 적 단 한번도 없답니다.^^ 어차피 또 그럴 게 뻔하니까요. 이곳은 겨울입니다. 영하로 내려가는 적 한번도 없는 겨울을 벌써 20년 가까이 맞지만, 체감온도는 한국보다 더 낮게 느껴지니 이게 무슨 조화속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말하지요... 추운 날씨입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지내세요.
답변달기
2010-06-24 19:12:07
0 0
marius (121.XXX.XXX.239)
제목부터 내용 까지 모두모두 참신하고 유익한 글입니다.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삶의 마감은 없다는 표현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의 물을 일정 기간 가두어 두면 침전이 되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내용의 힘이 발현 되지 않습니까. 모아두는 힘, 집적시키는 능력이 마감의 힘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은 글을 읽고 맨손으로 그냥 지나가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아니 송구스럽습니다.
답변달기
2010-06-11 06:48:37
0 0
신아연 (110.XXX.XXX.142)
언제나 과찬을 해주시지만 격려의 말씀으로 새길 뿐입니다. 마감을 향해 응집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목표를 향한 집중된 에너지와 유사한 듯 하지만 어딘가 새나가는 게 많지요. 에너지의 종류도 여러가지라는 것을 요즘 많이 체험합니다.
답변달기
2010-06-24 19:09:19
0 0
차덕희 (121.XXX.XXX.225)
깔끔하고 씩씩한 글의 맛이 생수처럼 시원함니다.
계절상 환경상 생긴 우울함이 가시는 듯 함니다.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람니다.성격도 시원 시원해 보이네요.
답변달기
2010-06-10 21:46:15
0 0
신아연 (110.XXX.XXX.142)
제 성격은 매우 우유부단하고 한편 징하답니다.^^ 솔직한 면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요.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2010-06-24 19:07:13
0 0
이란이 (110.XXX.XXX.142)
어쩜 그리도 글이 재미있고, 정갈하며, 솔직하신지...
감탄, 또 감탄!

조만간 변화가 생길 거라고 해석이 되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답변달기
2010-06-10 11:41:43
0 0
신아연 (110.XXX.XXX.142)
과찬이지만 듣기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남편이 새 일을 시작하게 되어 그 변화의 바람을 함께 탈까 합니다.
답변달기
2010-06-24 19:05:51
0 0
인내천 (112.XXX.XXX.244)
ㅋㅋ..미뤘다 마감 앞에서 해치우는 스타일이 저랑 넘 비슷해 피식 웃었습니다. 마음 속으론 늘 고쳐야겠다 작심하면서도 아직 그대로랍니다.굳이 변명을 한다면 마감 전에 충분히 여유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 그러다 쫒겨서 후닥닥 헤치우고난 뒤의 상쾌함도 괜찮구요. 이러다간 전 평생 두 즐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그것이 제 생의 데드라인으로 다가오면 모를까...
답변달기
2010-06-10 10:17:59
0 0
신아연 (110.XXX.XXX.142)
누가 그러더군요. 마감을 의식하고 있는 동안도 글을 쓰는 기간이라고... 어차피 못 고칠 버릇이라는 것 저도 잘 압니다. 그나마 마감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답변달기
2010-06-24 19:04:52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