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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유서
김흥숙 2010년 03월 12일 (금) 03:28:14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絶緣)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유칼럼에 실릴 원고를 편집진에 보내고 늦은 점심을 먹는데 법정(法頂) 스님의 입적 소식이 들립니다. 어느 해 4월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하셨다는 스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먹던 밥을 마저 먹습니다. “스님, 마침내 낡은 옷 벗으셨네요. 부디 안녕히 가세요.” 입으론 밥을 먹어도 마음으로 인사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젊음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법정 스님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제가 부자가 되지 못한 건 의욕 부족 유전자의 탓과 더불어 난초 두 분(盆)을 향한 집착과 소유욕마저 부끄러워했던 스님 탓이 큽니다. 오랜만에 스님의 수상록 ‘무소유’를 들춥니다. ‘미리 쓰는 遺書’가 실린 76쪽입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문단으로 시작하는 유서에서 스님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불구인 엿장수를 속여 엿을 빼돌렸던 일을 아프게 참회합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果報)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리곤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하지 말라며 만일 그런 일을 행하면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거라고 일갈합니다. 다비식은 내일 스님의 출가 본사인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에서 치르지만, 평소에 가르치신 대로 특별한 행사는 하지 않을 거라는 송광사 관계자의 말에서 스님의 항심(恒心)이 느껴집니다. 스님이 잡지 ‘여성동아’의 요청을 받고 ‘미리 쓰는 遺書’를 쓰신 게 1971년 3월이니 꼭 39년 전입니다. 아침 밥 먹을 때와 점심 밥 먹을 때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로 넘치는 세상, 스님을 잃은 슬픔보다 항심을 잃은 슬픔이 큽니다.

스님은 그 유서에 두어 가지 원(願)을 밝혀 놓으셨습니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 군데 있다. ‘어린 王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入國査證)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생(來生)에도 다시 한반도(韓半島)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 대도 모국어(母國語)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스님과의 이별로 슬프고 스님은 헌 옷 벗어 기쁘실 지금, 혹 벌써 한반도 어딘가에서 태어나신 건 아닌지 슬며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엊그제 쌓였던 눈이 여린 햇살에 녹고 있습니다. 길마다 눈물이 흥건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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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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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218.XXX.XXX.130)
어딘가 가고 싶다는 말 자체가 미련?
해 지는 광경 항상 본다는 그 곳에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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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6 09: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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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co (113.XXX.XXX.102)
천 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 부울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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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11:39:15
0 0
정범구 (218.XXX.XXX.130)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여러가지 산란한 마음으로 그와의 이별을 생각하고 있는데 김선생님이 참 명료하게 그의 삶과 죽음을 정리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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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4 17: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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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211.XXX.XXX.51)
법정 스님의 정신과 철학이
글을 쓰신 시인의 감수성과 필력에 함께 잘 조화를 이루고,
단 한 줄의 불필요한 문장도,
한 토막의 과장된 미사여구도

'소유'하지 않는,
법정 스님의 입적에 걸맞는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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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23: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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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29)
법정스님의 다른 세상 가시는 것은 마음으로 촛불을 켜듯 하는데,노 전 대통령의 가신 길은 많이 안타까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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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20: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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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준 (218.XXX.XXX.130)
김흥숙님, 좋은 글 읽게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갑니다. 문운이 창대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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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17:07:40
2 2
ys청봉 (118.XXX.XXX.158)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류시하님이 엮은 "산에는 꽃이 피네" -법정스님 - 아라는 책이 마침 집에 있어 다시 읽어봅니다.
스님께서는 "산도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고 등산이란 말을 쓰지않았다.꼭 입산,산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겸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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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1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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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112.XXX.XXX.244)
소유욕의 발동으로 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어 절대가난에서 벗어났다면 꼭 소유욕이 무소유보다 하위개념이 아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절대가난의 춘궁기때가 무소유개념이 더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가난을 극복한 지금도 우리는 상대적 가난 앞에서 더 비참해하고 있으니 시공을 초월해서 무소유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이 적어서 가난한게 아니라 나누지 못해서 가난하다면 모두가 무소유개념으로 무장할 때 가난과 아픔은 사라지겠죠?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는 지금, 법정스님의 입적이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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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1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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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재 (218.XXX.XXX.130)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보며 눈물을 자아내는 이 글 말미에 제 눈시울이 젖는 것이......

고마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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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09:43:30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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