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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김이경 2010년 03월 10일 (수) 00:31:37
엘리베이터에 탄 꼬마는 넥타이에 조끼까지 완벽한 정장 차림입니다. 젖살이 통통한 얼굴은 차림새에 걸맞은 엄숙함을 유지하느라 잔뜩 굳어 있습니다. 하지만 “와, 정말 멋져요!” 하고 제가 감탄사를 터뜨리자 이내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배시시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 엄마가 뿌듯한 얼굴로 말합니다. “오늘이 입학식이에요.”

처음 학교에 가는 모자의 들뜬 모습을 보니 제가 다 설렙니다. 그리고 오래 잊고 있었던 제 처음도 떠오릅니다. 내게도 저런 처음이 있었는데, 가슴 두근거리던 순간이 있었는데… 아스라한 처음의 기억에 볼이 물들고 가슴 한편이 싸해집니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의 기억은 없지만 처음 학교를 졸업하던 날의 모래바람은 기억에 선합니다. 처음 교복을 입었을 때, 처음 생리를 했을 때, 처음 바다를 봤을 때, 처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처음 이별했을 때, 처음 출근했을 때, 그렇게 많은 처음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문득, 처음의 그 설렘과 두려움이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다시 처음을 느끼기 위해 펼친 책, 존 쿳시의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입니다.

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존 쿳시가 예순일곱에 발표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독특한 모양새부터가 기존의 소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250쪽이 채 안 되는 소설을 일주일 내내 붙들고 있었던 것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새롭고 낯설고 읽기 힘든 소설이지만,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이 남는 책이기도 합니다.

책을 펼치면 점선을 사이에 두고 둘 혹은 셋으로 나뉜 페이지가 나타납니다. 페이지 윗부분은 소설의 화자인 주인공 JC가 쓰는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에세이입니다. 작가인 JC는 같은 제목으로 독일에서 출판될 책을 위해 현대 세계의 문제점에 관한 논쟁적인 에세이를 쓰는 중인데, 바로 그 원고가 소설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그리고 점선 아래에 JC가 매력적인 젊은 여성 안야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통적인 소설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지요.

점선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는 건 안야가 JC의 타이피스트로 일하면서부터입니다. 이제 페이지 맨 아랫부분은 안야가 차지합니다. 안야는 또 다른 화자가 되어 JC와는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느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둘 -JC와 안야- 또는 셋 -글 쓰는 JC와 행동하는 JC와 안야-의 화자가 등장하여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데 이 소설의 매력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글이 한 페이지에 나오는 데다 화자도 스토리도 제각각인 소설을 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단 독서 자체가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며 에세이를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점선 아래 JC의 이야기를 읽고, 또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안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물론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오가는 돌림노래 같은 독서가 성가시다면, 늘 하던 대로 페이지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차례로 읽어 내려가도 됩니다. 하지만 이 방식을 택한다 해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끊어진 이야기를 돌이키며 매번 새롭게 생각의 끈을 이어가야 하는 수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독자 마음이지만 어느 쪽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행인 것은 그 수고에 값하는 즐거움을 소설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에세이는 별도의 책으로 묶어도 될 만큼, 어지간한 철학책에서도 맛볼 수 없는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은 그 중 한 대목입니다.

“국민에게는 늘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이 주어진다. 선택의 형식에는 토론의 여지가 없다. 투표용지에는 ‘당신은 A 혹은 B를 원합니까, 아니면 양쪽 다 원하지 않습니까?’라고 쓰여 있지 않다. A와 B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 즉 ‘평범한’ 사람들은 속으로는 아무도 선택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향일 뿐이다. 국가는 경향을 상대하지 않는다. 국가가 상대하는 것은 선택이다. … (민주주의는 말한다.) 그 시스템에 못마땅한 게 있어 바꾸고 싶으면, 시스템 안에서 해라.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시스템 밖에서의 정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다.”
JC(쿳시 자신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전을 던져 지도자를 뽑는다고 세계가 지금보다 더 나빠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누구보다 민주적 가치를 신봉하는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슬픔 때문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세계 각국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검열을 일삼는 선진 민주국가들에 대한 회의와 절망, 그리고 그로 인해 죽고 고문당하는 무죄한 생명들에 대한 슬픔이 그를 깊은 허무에 빠트린 것이지요.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안야는 그의 비분강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치 이야기는 그만두라고, 대신 새에 대해서, 주변세계에 대해서 써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저명한 노작가가 일개 타이피스트의 말을 들을 리 없지요. 하지만 예쁘고 섹시한 안야는 거침없이 얘기합니다. 당신의 무미건조한 말투는 질색이라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말투는 독자를 질리게 할 뿐이라고 말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작가 앞에선 신랄하게 그를 비판하는 안야지만 막상 애인 앨런과 이야기할 때는 작가 편이 되어 그의 관점을 옹호한다는 겁니다. 그의 글을 읽고 타이핑하고 비판하는 사이 어느덧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공감과 이해는 작가에게도 일어납니다. 책의 후반부를 이루는 ‘두 번째 일기’는 바로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개인적인 에세이들로 시작됩니다.

그 에세이들 중에는 안야가 써보라고 했던 공원의 새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죽은 아버지에 관한 추억담도 있으며, 키스에 대한 소품과 죽음에 대한 상념들도 있습니다. 안야와의 만남이 ‘강력한 의견들’을 쓰던 그에게 이런 ‘부드러운 의견들’을 쓰게 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는 당신 책에 자기가 나오느냐고 묻는 안야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책의 모든 곳에 있어요. 모든 곳에 있고 아무 곳에도 없어요. 똑같은 정도는 아니겠지만 신처럼 말이지요.”

예쁜 여자에게 후한 것은 남자들의 본병이지만, 신처럼 존재한다는 이 말이 꼭 입치레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구원에 대한 희구라면, 신조차 전쟁의 원인이 되어버린 지금, 유일한 구원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교감뿐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러고 보면 생활도 생각도 인종도 성별도 세대도 다른 안야와 JC가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랑에 이르듯, 사람이, 사람 사이의 소통이, 거기서 싹트는 사랑이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인 것도 같습니다.

낯선 문법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처음 누군가를 만나고 처음 뭔가에 도전하는 것은 설레면서도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낯선 만남을 피하고 익숙한 일만을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편한 독서가 상상치 못한 희열을 주듯이, 떨림의 시작을 기꺼이 감당한 이에게는 가슴 뿌듯한 결실이 주어집니다.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는 이 봄, 부디 당신도 새롭게 시작하기를, 모든 날들을 처음처럼 살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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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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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29)
이 글을 읽으니 마치 제게 개인적으로 해주는 조언과 위로로 받아 지네요.의사소통과 상호이해 년초부터 문제가 있었거든요.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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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20:32:01
0 0
인내천 (112.XXX.XXX.244)
존 쿳시의 소설이 낯선 탓에 김이경님의 칼럼도 낯설어 불편(?)하게 읽었음다~~^^
불편한 독서가 심상치 못한 희열을 준다기에 참고 읽었음다~~ㅋㅋ
6,2 지방선거가 코 앞이라서, 국가는 경향을 선택치 않고 제시하는 것 중에서만 고르길 선택한다는 말이 머리를 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라는 말에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지방자치의 연륜이 쌓일수록 선량들의 수준도 향상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설치는 모두가 JC의 비분강개도 안야의 부드러움도 갖추지 못한 얼치기들이니 답답합니다. 진정한 선량은 비분강개와 정원의 새도 눈여겨 볼줄 아는 양면성을 지니고 첫 마음을 지키는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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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1:32:44
1 0
이원명 (218.XXX.XXX.130)
김이경님의 글은 정말 좋습니다. 제가 환갑이 넘었는데 이제 뭔가를 가르침을 받는 그런 기분입니다. 그런데 김이경님도 주위에서 가벼워지라고 도닥거리는 사람은 없는지요.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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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0:11:46
1 0
한승국 (218.XXX.XXX.130)
<인사동 가는 길>이란 책을 쓰셨다는데 혹 인사동 이야긴가요? 그렇담 그 속에 <시인과 화가>라는 문인협회 회원이신 변영아 씨가 운영하던 풍금카페를 아시는지요? 그집이 지난 달 아주 문을 닫았다는 것도요? / 한승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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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0:10:32
0 0
김이경 (175.XXX.XXX.139)
책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어서 풍금카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제가 과문한 탓에 말씀하신 곳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인사동이 전같지 않아서 저 역시 서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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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10:58:30
0 0
정범구 (218.XXX.XXX.130)
"동전을 던져 지도자를 뽑는다고 세계가 지금보다 더 나빠졌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명색이 정치인이랍시고 행세하는 제게도 이 질문은 참 뼈아픈 질문입니다. 김이경 선생님 글을 늘 관심있게, 음미하며 읽고 있습니다. 한번쯤은 좋은 글에 대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 오늘 간단히 몇자 드립니다. 늘 건강하셔서 좋은 책 많이 소개해 주시고 좋은 글 써 주시기 빕니다. 정 범 구 드림
답변달기
2010-03-11 10:09:3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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