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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거울
오마리 2010년 02월 26일 (금) 04:37:08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매일 오전 오후 내게 서예를 가르치시겠다며 고서로 가득했던 문방사우의 서재에 칠판을 들여 놓으셨습니다. 쪽문 밖의 해바라기들이 보이는 서재에서 노닥거리는 것은 좋아했지만, 아직도 놀기에 빠져 있던 내가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무릎을 꿇고 붓글씨 연습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발이 저렸는지, 이쪽 저쪽으로 발을 폈다 구부렸다 하기를 한 두 번 하는 것도 모자라 발이야 저리지 말거라, 하며 침을 손가락에 찍어서 콧등에도 바르지만 어디 저린 발이 침 바른다고 저리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서예 연습을 시작하기에 앞서 앉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신 후 연적에 물을 담는 방법, 물을 얼마만큼 벼루에 떨어뜨려야 하며, 먹은 어떻게 갈아야 하는가, 연습종이는 어느 위치에 놓고 붓은 어떤 손가락으로 어떻게 잡는지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한 획 한 획 정신을 집중하여 정성으로 글씨를 쓰듯이 먹을 가는 자세도 그와 같아야 하며,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정성스럽게 갈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먹을 갈지자로 아무렇게나 갈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성질 급하게 가는 게 아니야.”
“먹은 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연당 위에서 천천히,
부드럽고 둥글게 밖에서 안으로 갈아 연지에 모으는 거란다.”

연습지에 연습할 때는 개먹이라고 불리는 송연묵(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듬)을 썼는데, 이것은 싼 먹으로 진하게 쓰면 시꺼멓고 연하게 쓰면 푸르딩딩한 글씨가 영 볼품이 없습니다. 나중 내 글씨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자 아버지는 유연묵(식물성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만듬)이라고 불리는, 가격이 비싼 참먹을 쓰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글씨를 쓸 때뿐만이 아니라 먹을 가는 것도 참먹으로 갈아야 재미있고 개먹으로 갈면 영 재미가 없습니다. 개먹을 갈아 놓으면 때깔이 나지 않고 우중충한 것이 글씨를 써도 폼이 나지 않으니 말 그대로 개먹은 개먹이어서 갈기도 쓰기도 싫었지요. 붓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칠고 성긴 붓은 싼 게 비지떡이라고 이런 붓으로 쓴 글씨는 어린 내 눈에도 확연하게 거칠어 보이기만 하였습니다. 온실 안의 화초처럼 자라던 내가 그 때 최초로 세상 물정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비싼 것들은 더 좋은 결과를 얻는구나, 라는 공부를 한 거지요.

겨울방학 때보다 무더운 여름방학 때는 더욱 글쓰기가 힘들어지고 싫어집니다. 무릎 꿇고 엎드려 쓰다 보면 온 몸이 땀에 젖어 땀방울이 뚝뚝 먹 글씨 위에 떨어지는데도 종이가 날리면 글을 쓸 수 없으니 선풍기를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다 글을 쓰다보면 발이 저리는 것은 물론 온 몸이 근질거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루한데 가끔 아이들이 놀자고 부르는 소리나 쪽문 옆 담장의 해바라기에 시선과 정신을 온통 빼앗길라치면 아버지는 자그마한 붓 대롱으로 여지없이 내 손 등을 내리치셨습니다.

“정신통일이 안 되어 획이 틀어지고 있어. 마음이 흐트러진 게야.”
"그 획은 내려갈 때 점점 힘을 빼야 해.”
“이 획은 내려 뻗되 마무리를 힘있게 하는 거란다.”
"기억하거라. 네가 쓴 글씨는 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란 것을."

서예의 기본필법인 필압의 강약 경중을 말씀하신 건데 내 눈물은 습자지 위에도, 글씨를 쓰고 있는 손등에도 후두둑 떨어지곤 했습니다. 사실 어린 내가 그런 어려운 용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장시간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만도 장한 것이지요!

서예는 점과 선·획(劃)의 태세(太細)·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필순에 따른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조형미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이런 어려운 단어의 뜻도 모르면서 시작했던 내 서예 공부의 첫 번째 연습은 궁체였습니다. 궁체 서예실력이 궤도에 오르자 한문 초서를 준비합니다. 아버지는 칠판에 한자를 쓰기 시작하시고 나는 하늘 천 따 지를 흥얼거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수년이 흘러 도내 서예대회에서 특상을 받게 된 작품은 매우 커다란, 어린 나의 다섯 손가락을 모두 합친 것 정도 크기의 붓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탄력이 큰 털로 만들어진 보통 길이의 중봉(中鋒)이자 강호필(剛毫筆)이라 불리던 힘이 좋은 붓으로, 한 번 그 붓으로 먹물을 찍으면 벼루에 있던 먹물이 거의 다 없어질 정도였습니다. 그 때 쓴 글은 족자 위에 커다랗게 쓴 오직 한 글자, '넋’으로 혼을 의미하는 일필휘지 궁체였습니다. 지금 생각하여도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막내인 나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진 글씨를 쓰게 하셨는지 의문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던 13세까지 지속되었던 서예공부는 아버지의 타계 후 절필을 해 버렸습니다. 장차 여성 서예가가 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수준에 올랐던 실력이었다고 지금도 단언할 수 있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다시는 서예를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작심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써두었던 글들도 아버지가 떠나가셨듯이 모두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필묵함도 고서들도 서재의 수묵화 병풍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갔습니다.

서예는 물리 수학과 같지 않아서 짧은 시간에 실력이 향상되는 공부가 아닙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서예도 오랜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예술 분야처럼 호기심에서 시작한다거나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린아이에게는 참을성을 훈련시키는 아주 어렵고도 고통스런 공부였을 뿐 입니다.

그러나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날보다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에야 아버지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왜 아버지는 오직 어린 나에게만 서예훈련을 시키셨는지, 혼을 의미하는 ‘넋’이란 글자를 쓰게 하셨는지도 알 것 같은 나이입니다. 썩 그렇게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만도 않은 생을 살아내면서 이제 내가 깨닫는 것이 있다면 인내 없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고의 시간을 거치는 만큼 우리의 넋도 맑은 강물이 되어 흐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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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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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119.XXX.XXX.235)
참 힘들었겠어요. 철부지일 때 저런 식으로 가르치는 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글을 읽으니 예전 초등학교 다닐 때 고전읽기반에 들어가 경시대회 준비한다고 절 속에 가서 합숙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졸려 죽겠는데 꿇어 앉아 꾸벅 꾸벅 졸면서 책을 읽던 생각이 납니다.
"넋"이란 글자가 주는 뜻을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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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3:21:28
0 0
jsk (121.XXX.XXX.219)
캐나다 로세트 처럼 나이가 먹어서 배우고
아버지가 그때가지 살아 계셨다면 그 뜻을 기리어 여성 서예가 되었을텐데...아쉽습니다.
참묵을 갈 때 그 향기 얼마나 매혹적이고 향기로운지...

저는 어릴적 글씨는 배우질 못하고 그림을 먹으로 그렸었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골방에서 이틀을 꼬박 새우고
코피를 흘리던 기억이 난답니다.
아마 마리님은 서예가 취향과는 거리가 좀 멀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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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6:02:51
0 1
김휘동 (211.XXX.XXX.129)
당신의 부친은 당신에게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진정한 넋을 지닌 사람이 되게 하신듯 합니다. 지금 부친의 깊은 뜻을 이해하니 말입니다. 부모는 나의 거울이니 당신도 당신의 자식을 그대로 가르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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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3:19:39
0 1
김영수 (118.XXX.XXX.158)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서예를 계속하시지 이 글을 보는 사람이 더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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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0:22:37
0 0
인내천 (112.XXX.XXX.244)
그냥 글씨만 가르치신게 아니라 혼을 갖고 살라고 "넋"을 쓰고 알게 하신 아버님의 혜안이 존경스럽습니다!
요즘,넋 나간 지도자들이 지도를 받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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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0:13:07
0 0
권기철 (211.XXX.XXX.129)
부녀지간의 사랑과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교훈을 잘 표현하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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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09:30:2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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