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와 창암_(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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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창암

방석순

2009년 11월 18일 (수) 01:17:23

조선의 명필 하면 으레 석봉(石峯)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金正喜)를 꼽습니다. 그리고 세종의 둘째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넣거나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자암(自庵) 김구(金絿), 혹은 자연을 벗삼아 전국 도처의 큰 바위에다 호탕한 글씨를 남긴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을 넣어 삼대명필이니 사대명필이라 부르곤 합니다.

사실 눈만 뜨면 책을 읽고 먹을 갈던 선비 사회에서 명필을 서넛으로 한정지을 수야 있겠습니까. 글씨를 쓰고 보던 시대의 조류와 안목에 따라서는 도와 예와 힘을 갖춘 명필들이 경향각지에 즐비했을 겁니다.

어쨌거나 글씨에 관한한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체는 교과서를 통해서나 유적지의 현판, 비석에서 몇 번쯤은 대하기 마련입니다.


	강진 다산초당 현판-김정희 글씨

추사체가 왜 그렇게 대단한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획은 과하다 싶게 굵고 어떤 획은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고. 또 어떤 글씨에서는 그가 교유했었다는 청나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의 필체가 얼비쳐 보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다른 글씨들과는 다른 데가 있지만 더러 괴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사 당대에 벌써 “법도에 어긋남도 없지만 법도에 구속됨도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니 명필임에 틀림없겠습니다.

세한도(歲寒圖)에 쏟아지는 찬사에 대해 아리송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글과 그림을 보는 안목이나 이해가 부족한 탓일 겁니다. 하긴 세한도의 그림만 옮겨놓고 정작 의미심장한 글은 잘라버리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글씨나 그림이라면 괴발개발 그리는 재주밖에 없는 저로서는 보는 글씨마다 명필 아닌 게 없었습니다. 그런 문외한이 굳이 글씨 타령을 늘어놓는 이유는 명필들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들이 남긴 구수한 사연들에 이끌렸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 친구들이 무리지어 떠난 해남 여행길에 뜻밖에도 여러 명필들의 글씨를 직접 대조해 보며 그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외지 여행객들을 위해 봉사 나온 전남문화관광해설사 이연숙 씨 덕분이었습니다.


	두륜산 자락의 대흥사 전경

두륜산(頭輪山) 자락에 자리잡은 고찰 대흥사(大興寺)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승군을 지휘한 곳이어서 유명합니다. 우리의 차 문화를 일으킨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머물던 곳이어서 유명하기도 합니다. 경내에는 승군의 총대장 격이던 서산대사, 그를 돕던 사명당(泗溟堂)과 처영(處英), 세 대사를 모신 표충사(表忠祠)가 있습니다. 그리고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당대의 석학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제주로 귀양가던 명필 김정희가 초의선사로부터 차 공양을 받았다는 일지암((一枝庵)도 있습니다.

그 대흥사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이대 연대 숙대를 나왔다”는 우스개로 자신을 소개한 이연숙 씨는 “대흥사는 마치 명필들의 경연장 같은 곳”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김정희 글씨

대흥사 무량수각(无量壽閣)과 동국선원(東國禪院), 일로향실(一爐香室)의 현판은 추사의 글씨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천불전(千佛殿,) 침계루(枕溪樓), 해탈문(解脫門)의 현판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입니다. 가허루(駕虛樓))는 창암(蒼巖) 이삼만(李三晩)의 글씨입니다. 표충사의 현판에는 정조의 어필(御筆)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라고 불리는 명미당(明美堂) 이건창(李建昌)의 5대조 이광명(李匡明)과 같은 시대의 일가붙이입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는 조선의 양명학(陽明學)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일찍 강화도에 은둔한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 의해 기초를 닦고 그 손녀사위 이광명을 연결고리로 정씨와 이씨 가문에 전수되어 강화학파를 이루게 됩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뿐 아니라 시문, 언어, 서예도 중시했다합니다.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이광사 글씨

그런 인연으로 이광사 역시 강화를 드나들며 정제두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문하의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웠습니다. 진도로 유배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원교는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습니다. 또 원교체(圓嶠體)라는 특유의 필체를 개발해내 그 지역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쓴 대웅보전이나 침계루의 현판을 보면 마치 마디가 불거진 단단한 옹이박이를 보는 듯합니다. 중국 서풍(書風)에서 탈피한 그 글씨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 불렀다 합니다.

정읍에서 태어난 이삼만은 귀양살이 온 이광사에게서 글씨를 배웠습니다. 어찌나 몰두했는지 집안일도 돌보지 않았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거르는 일 없이 매일 천자씩을 썼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혼인도 후사도 친교도 늦어져 원래 ‘규환’이던 이름을 ‘삼만(三晩)’으로 바꿨노라고 이연숙 씨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대흥사 가허루 현판-이삼만 글씨

솔직히 현판의 글씨를 현장에서 들여다보고 그 주인공들의 면모를 들어봐도 알쏭달쏭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이 현판들을 남긴 주인공들이 벌였다는 해프닝을 전하는 이연숙씨의 이야기가 얼마나 구수했던지 모두들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사건은 명문세가의 후손으로 한때 청나라 거유들과 교유했던 추사가 상소문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유배를 떠나며 벌어지게 됩니다. 당대의 큰 학자요 명필인 추사를 맞아 창암의 제자들이 스승의 글씨에 대한 평을 청한 것입니다. 그때 창암의 나이 벌써 일흔. 그러나 제자들은 중앙무대에서 내려온 국제적 명사로부터 스승에 대한 찬사를 듣고 싶었겠지요. 잔뜩 기대하고 묻는 그들 앞에서 말없이 글씨를 내려다보던 추사가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그 글씨라면 노장이 밥을 굶지는 않겠소.”


	표충사 현판-정조 글씨

격 노한 창암의 제자들이 당연히 추사에게 해코지하려 들었겠지요. 그 말을 전해들은 창암이 만류하며 말했답니다. “그이가 천하 명필이라더니 조선 붓의 갈라지는 맛과 한지의 번지는 멋은 아직 모르는가보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날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답니다.

제주로 향하는 길목 해남의 대흥사에는 마침 추사의 오랜 친구인 동갑나기 초의선사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초의를 찾은 추사가 대웅보전의 현판을 들여다보더니 대뜸 “저 현판은 떼어내게. 내가 다시 써 줄 터이니” 하고 말했습니다. 초의는 아무 말 않고 추사가 하자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8년여. 찾아주는 이 없는 제주 유배생활의 시름을 추사는 책과 글로 달래야 했습니다. 그 제주에서 부인의 부음을 받았습니다. 역관으로 중국에 다녀오며 귀한 서적들을 전해주던 제자 이상적(李尙迪)의 의로운 인품을 기려 세한도를 그린 것도 그때입니다.

추사는 62세가 되어서야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귀경 길에 다시 해남을 지나게 됩니다. 대흥사에 당도한 추사가 다시 초의에게 물었습니다.
“예전에 걸었던 대웅보전 현판은 어찌했나?”
“어디 헛간에 있을 거야. 난 원래 잘 버리지 못하는 성미거든.”
“그럼 그걸 찾아다가 다시 걸어주게. 내가 그땐 잘못 보았던가보이.”
그래서 오늘까지도 대흥사 대웅보전엔 원교의 현판이 걸려 있게 되었답니다.

추사는 또 그가 탐탁찮게 여겼던 창암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러나 추사보다 16세나 위인 창암은 벌써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추사는 완산군에 묻힌 창암의 묘소를 찾아가 ‘명필완산창암이삼만지묘(名筆完山蒼巖李三晩之墓)’라고 묘비명을 써 주었습니다. 문화유적 답사에 부지런한 어떤 이는 지금의 창암 묘비명이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듯이 썼지만 향토 명필에 대한 무한 존경의 표시인지 이연숙 씨는 추사의 글이라고 단정 짓듯 말했습니다.

지난 7월 완주군이 용진면 용흥리에서 추사와 창암이 함께 글씨를 쓴 묘석을 찾아냈다고 발표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발견된 광산 김씨의 묘비 전면 표지는 추사체로, 측면과 후면 일대기는 창암의 해서체로 씌어 있습니다. 이래저래 경향의 두 명필이 참으로 묘한 인연을 나눈 셈입니다.

“제주도에서 인고의 8년 세월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추사가 과연 원교나 창암의 참 가치를 알 수 있었을까요?”
고통과 시련이 있었기에 추사도 그만큼 인성과 사고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연숙 씨는 토를 달았습니다.

대흥사에 이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유적지 녹우당(綠雨堂)에서도,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에서도 내내 문화관광해설사들의 구수한 입담으로 우리는 마치 그곳의 옛 주인들을 만난 것 같은 훈훈함을 느꼈습니다. 어딜 가나 텅 빈 껍데기뿐이던 우리의 문화유적들이 비로소 알맹이를 채워가는구나 하는 기쁨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libero (223.XXX.XXX.38)

http://www.grandculture.net/wanju/toc/GC07000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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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16: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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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철 (121.XXX.XXX.244)

자세한 역사적 설명과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느낌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읽겠습니다. 그리고 호남지역의 문화 유산도 관심 갖고 보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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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 10: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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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96)

청춘시절 글씨를 못써서 부끄러움을 타던 남친이 있었어요.인품이 좋은 남친이여서 의아하게 생각했지요.신언서판으로 사람을 평하던 시대였지요.타이핑해도 되는 시절로 바뀌었어도 친필 못쓰는 글씨로 서로 보내던느림의시간이 그립습니다.현충사(아산)0글씨들을 보았는데 충무공의 기백을 못느끼고 온것이 아쉽던데요.좋은 여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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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16: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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